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마이클 콜린스(정치인) (문단 편집) == 생애 == || {{{#!wiki style="margin:-5px -10px" [[파일:마이클 콜린스_01.gif|width=100%]]}}} || || {{{#white 연설하는 [[마이클 콜린스|{{{#white 마이클 콜린스}}}]] (1922)}}} || 1916년 아일랜드 공화주의자들의 무장투쟁이었던 [[부활절 봉기]]에 참여했다. 봉기 종료 후 체포되었으나 주동자가 아니라는 이유로 살아남았다.[* 당시 콜린스는 지도부 중 한 명인 플렁킷 백작의 전속 부관이었고, 플렁킷 백작의 아들 조지프 플렁킷은 총살당했다. 그 외에 [[에이먼 데 벌레라]]는 미국 시민권자라서, 콘스턴스 마르키에비치 백작부인은 여자라는 이유로 처형을 면했다.] 1918년 [[영국 하원]] [[영국 총선|선거]]에 출마하여 당선되었고, 다른 [[신페인]] 소속 하원의원들과 함께 의회 등원을 거부하고 [[아일랜드 의회|아일랜드 국민의회]](Dáil Éireann)를 차렸으며 아일랜드의 독립과 [[아일랜드 공화국]] 건국을 선포했다. 1919년 여름 마이클 콜린스는 아일랜드 공화동맹의 단장으로 추대되었고, 9월에는 아일랜드 공화국군 정보부장으로서 [[IRA]] 사실상의 중요 지도자로 활약하게 되었다. 또한 대통령인 데 벌레라에 의해 재무장관직도 맡게 되었다. 마이클 콜린스가 이끄는 IRA의 전략은 게릴라전 및 주요 요인의 암살 및 테러였다. 그는 [[영국]]의 주요 인사에 대한 암살을 노리는 특수부대를 창설하였으며, [[미국]] 등에 이주한 [[아일랜드인]]을 중심으로 일종의 애국 공채 등을 통해 자금을 조달하였다. 또한 주로 [[외교]] 활동을 독립 수단으로 삼은 대통령 데 벌레라[* 아일랜드 공화국은 독립 선포 당시에는 대통령이 없었지만 1921년에 대통령직이 창설되고 대통령으로 데 벌레라가 선출되었다.]가 부재할 때 아일랜드 공화국을 이끌기도 하였다. 이 때문에 그는 마이클 콜린스가 자신의 위치를 위협한다고 여긴 [[에이먼 데 벌레라]]에게서 끊임없는 견제를 받아야만 했으며, 둘의 사이는 좋지 못했다. 1921년 아일랜드 독립 전쟁의 휴전 후 협상에서 데 벌레라는 마이클 콜린스를 대표로 내세웠다. 이유는 당시 영국 국왕 [[조지 5세]]가 회담에 참석하지 않는데, 그와 동급인 대통령인 자신이 참석할 수는 없다는 것이었다. 그리하여 아일랜드 측에서는 마이클 콜린스와 아서 그리피스를 중심으로 한 대표단이 협상에 참여하게 되며[* 영국 측 대표는 자주 바뀌었으며, 후에 [[영국 총리]]가 되는 [[네빌 체임벌린]]이 고정 멤버로 참여하였다. 영국 측 대표 중에는 유명한 [[윈스턴 처칠]]이 포함되기도 했다.], 1921년 12월 6일 최종적으로 협상안이 체결되었다. 이 협상안은 아일랜드 국민의회에 의해 최종적으로 비준되어 아일랜드 자유국(Irish Free State, Saorstát Éireann)이 탄생했다. 이는 많은 논란을 일으켰으며, 이 협상안에 반대하여 대통령 데 벌레라가 대통령직을 사임하고 당시 IRA 대원의 70%가 이 조약에 반대하여 아일랜드 자유국 정부군에 대해 다시 게릴라전을 일으키게 되었다. 조약의 주요 내용 중 문제가 된 것은 [[영국군]]은 얼스터 지방의 6개 카운티를 제외한 모든 지역에서 철수하나, 아일랜드는 [[아일랜드 자유국]]이라는 이름으로 [[대영제국]]의 [[자치령]]으로 남으며, 아일랜드 의회 의원들은 영국과 국왕에게 충성 서약을 해야 한다는 등의 내용이었다. 또한 이 조약은 결국 아일랜드의 남북 분단을 영구화한 조약이 되기도 했다. 현재까지도 [[북아일랜드]]는 영국령으로 남아 있다. 물론 당시 콜린스도 좋아서 이런 협상안에 서명한 것은 아니었으며, 그가 데 벌레라를 비롯한 조약 반대파 의회 의원들을 설득할 때 한 말도 '이 조약을 발판으로 더 완전한 독립을 이룩하자'는 식의 점진론적 관점에서의 찬성이었다. [[제1차 세계 대전]]으로 [[영국]]이 국력을 크게 소진하고 경제난으로 휘청거리고 있었던 덕이 컸지만, [[제국주의]]가 굳건했던 당시에 [[IRA]]가 이 정도 자치권을 얻어낸 것도 놀라운 성과였다. 일각에서는 당시 [[영국]]이 [[IRA]]의 게릴라전과 연이은 [[영국군]] 간부, 정치인 저격 암살에 당황하여 IRA 병력과 무장 수준을 실제보다 훨씬 과대평가해 상당한 양보를 했다는 설도 있다.[* 영국 정부에서는 협상안 통과 전까지 타결을 자신하고 있는 상황이 아니었다. 영국 측에서는 협상 당시 이 협상이 결렬된다면 단기적으로는 승리할 수 있을지 몰라도 장기적으로는 국내외 조건이 맞물려 폭발해 아일랜드 전역을 상실할 수 있음을 우려하고 있었다. 신생국 소련(당시 소비에트 러시아)의 아일랜드 독립운동 세력 지원, 진압으로 더 분노하게 될 아일랜드인의 재봉기, 거듭되는 전쟁 동원에 반감을 품은 영국 본토 민중의 저항 등등...] 이처럼 비정규전 게릴라전에서 마이클 콜린스의 군사 지휘력은 상당한 수준으로, 일부에서 현대 게릴라전의 선구자라고 찬양받기도 했다. 그러나 장기적인 동원력, 군사력으로 따지면 당시 아일랜드는 현실적으로나 잠재적으로나 도저히 영국의 상대가 되지 못했다. IRA의 실질적 지도자였던 마이클 콜린스가 당시 한계에 다다른 IRA 조직의 상황을 알고 현실적인 선택을 했다는 게 가장 일반적인 평가이다. 지금도 이 조약에 대해서는 당시 아일랜드의 입장에서 가장 현실적인 대안이라는 평가가 지배적이다. 심지어 한때 마이클 콜린스의 동지이자 라이벌이었고, 조약에 대한 입장 차이로 인해 그와 완전히 갈라선 인물이자, 후에 완전히 독립된 [[아일랜드]]의 대통령이 된 데 벌레라조자 "당시로서는 가장 현실적인 선택이었으며, 나는 틀렸고, 콜린스가 옳았다"고 고백하기도 했다. 이리하여 아일랜드 자유국이 성립되었으며, 사임한 데 벌레라의 뒤를 이어 아서 그리피스가 대통령으로, 마이클 콜린스는 총리로 선출되었다. 그러나 데 벌레라와 로리 오 코너등의 강경파는 그들을 따르는 IRA 조직과 함께 아일랜드 자유국을 부정하였고 이를 타도하기 위한 무장 투쟁에 돌입했으며, 아일랜드 자유국 또한 이들을 토벌하기 위해 군대를 파견하였다. 이리하여 [[아일랜드 내전]]이 발생하게 되었다. 콜린스는 전쟁을 끝내려고 영국과의 협상안의 체결로 인해 IRA 강경파들에게 배신자로 주요 타깃이 되었으며, 결국 1922년 8월 22일 매복하고 있던 IRA 단원의 총격에 의해 살해당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